기자되기

2. 기자도 인간일까?

이영남기자 2008. 10. 10. 00:58

<기자도 인간일까>

 

 '기자는 인간이 아니다.'
 내가 언론사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생각했던 각오다.

 기자도 '인간적' 일 필요는 있다. 하지만 취재할 때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사명감을 앞세워야한다는 생각에 '평범한 인간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렇게 여겼다.
 입사 후 10년동안 이 초심을 지키기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늘 집안
대소사는 취재보다 뒷전이었고, 기사의 수위를 낮춰 달라는 취재원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해 인정없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올 2월만큼 이 문구를 뒤집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기자도 인간이고 싶다'라고.

 
 지난 2006년 설 연휴 전인 1월 말 갑자기 데스크로부터 취재 지시가 떨어졌다. 당장 2월부터 기획 기사 2편을 잇따라 보도하라는 것이었다. 탐사 보도를 해보자는 데스크의 신년 계획에 취재 초기 단계의 설익은 기사 2건을 제안했던 것이 후회 막급이었다.
 첫 주는 '울산항 부실 시공',둘째 주는 '고교 배정 문제'.
 오랫동안 관심있던  사안이어서 완벽하게 취재해 빨라도 한달 뒤 쯤 보도할 생각이었는데 설 연휴를 빼면 나흘만에 준비해 연속 보도하라니! 고발성 기획 기사를 명절 직후-닷새를 쉬는 업체들이 많아 사실상 연휴 기간- 터뜨리는 것도 적당치 않아 보였다. 어렵겠다는 나의 답변에 데스크는 '일단 시도해보라'고 말했지만 무조건 해내라는 의미였다.
 우선 울산항 시리즈부터 취재를 시작했다.이미 확보한 울산항 37개 부두 등 시설에 대한 안전 진단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부실 시공이라는 점은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방송이 되려면
생생한 화면이 필요했다. 부실 시공이 드러난 곳은 부두 아랫 부분인데 평소 바닷물에 차 있어 접근이 힘든 곳이다. 소형 고무 보트를 빌리고 다이버를 섭외하고 울산해양청의 협조를 끌어내 부두 밑 부분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영상에 담았다. 설을 앞두고 분위기가 들뜬 지역 5개 기업체들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잘못 시공되고 잘못 보수된 부두들을 파헤치며 촬영했다. 울산항 기사는 설 연휴 이틀 뒤인 2월 첫날부터 3편으로 연속 보도됐다.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주 5편으로 방송이 예정된 '고교 배정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울산지역에 고교 평준화를 도입한 지 7년이 됐지만 매년 고교 배정 결과에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었다.그 원인과 대책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난 해 연말 기획을 시작해 그 해 입학생의 배정 자료는 확보했지만 보편성을 얻기 위해 올해 고교 배정이 끝날 때까지 보도를 미룬 상태였다.
 그런데 울산시교육청이 민원을 줄여보자는 속셈인듯 설 연휴 하루 전날 배정 결과를 발표하면서 보도 일정도 앞당겨진 것이다.기획 기사 보도 후 파장을 걱정하는
시교육청 직원에게 필요성을 거듭 설득해 올해 신입생들의 배정 자료를 손에 넣는 순간 취재는 끝난 듯 했다.하지만 혼자서 학생 4천여명의 집 주소와 배정된 학교를 놓고 현상과 문제점을 분석하는 작업은 더욱 험난했다.설 연휴까지 일해도 끝이 없어 윤주웅 기자가 취재에 합류했다.학부모와 학생들의 여론 조사도 실시하고 다른 도시의 배정 방법도 비교 분석해 당초 예정보다 많은 12편에 걸쳐 연속 보도했다.
 
 반향은 컸다. 현재의 방법이 최선이라던 울산시교육청은 7년 만에 처음으로 고교 배정 방식을 전면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울산해양청도 해당 기업체에 부두 재보수를 지시했고 제도 개선에 나섰다.
  주변에서는 힘든 일을 해냈다고 추켜세웠지만,나는 마지막 기사를 송고한 뒤 몸도 마음도 지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특히 2주간 밤을 지새우며 일하는동안 내팽개치다시피했던 가족들도 그제야 생각났다.
하지만 아이를 돌봐주시던 아주머니는
그때쯤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제도 개선을 위해 취재에 협조했던 시교육청 직원은 보도 직후 학부모들의 항의가
심해지자 나를 원망했다.  울산항 기사와 관련해서도 기업체들이 취재에 협조해준 울산해양청 직원에게 항의하는 바람에 직원들이 곤혹을 겪었다는 후문도 들었다.
 
 한달간 기자로서 직분에 충실하기위해 파고든 2건의 고발성 기사들은 분명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를 했고 땀을 흘린 가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적으로는 심한 외로움과 피곤함을 느꼈다. 처음에 가졌던 단호함이 약해져 질문으로 바뀌었다.
'기자도 인간일까?'
 
 다시 몇달 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다시 기획 취재 기사들을 쏟아내며
취재원들과 밀고 당기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울산방송 이영남 기자)
 이글은 한국언론재단의 <신문과 방송> 2006년 7월 에세이편에 수록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