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경 활용해 소방서 뒤집다>
지난 99년 울산시가 광역시로 된 후 처음으로 지방 소방사를 채용할때다. 우연히 한 소방서 앞의 모집 공고를 봤는데 눈길이 멈추었다. 12명을 뽑는데 남성으로만 제한한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구급 분야에서부터 전산과 통신 등 모든 분야에서 여성은 제외시켰다.
노동사무소에 확인했더니 특별한 이유없이 성에 차별을 둔 것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 기업체라면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으로 사법 처리될 사항이었다. 하지만 관공서는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어서 어떨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짧은 순간 기사를 쓸 것인지 망설였다. 화재 현장에서 소방 공무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취재 경험을 통해 익히 아는
처지였다. 때때로 소방관들이 촬영한 생생한 화면을 제공받기도 하는 방송 기자로서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근무 환경이 열악한 구조 구급 상황이 많기에 애초 남성 소방사만 선발하겠다는 구상이 그 당시 그들 입장에서보면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합격 여부를 떠나 모든 여성에게 응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소방사를 꿈꾸는 한 여성이 소방대학을 졸업한 뒤 이 분야에 지원조차 못하는 상황을 가상했다. 이는 함께 입사해 몇달간 룸메이트로도 살았던 카메라우먼이 다른 카메라맨들과 일하면서 체력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매일 맹운동을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기사를 쓰기로 했다. 그리고 이왕 쓴다면 다부지게 써서 변화를 이끌어내야한다는 사명감까지 느꼈다.
보름동안 방송쟁이들이 말하는 '그림'이 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서류 심사를 거쳐 체력 시험이 있는 날, 시험장을 찾아 촬영을 시작했다. 관계 공무원에게 왜 남자들에게만 응시 기회를 주는지를 물어 녹취도 했다. 지금은 이 부분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 의식을 느낄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관계 공무원이 나의 질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평등 개념이 희박했던 것 같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며칠을 더 기다렸다. 여성부 장관에 해당하는 강기원 여성특별위원장이 그다음주 울산을 방문하기로 돼 있었다. 나는 여러명의 기자들이 모여있던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강 위원장에게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울산시 소방사 채용 공고문을 보여주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명백한 남녀 차별입니다.남자만 이 업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납득이 안되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이 부분을 녹취한 뒤 거의 3주만에 소방 공무원 채용 관련 기사를 완성했다.
그날 저녁 SBS에 기사 내용을 설명하고 전국 방송을 내겠는지 물었다.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일단 기사를 보낼테니 방송 여부는 이후 결정하라고 말했다.
'소방공무원의 생활을 소재로 인기를 끌고 있는 (SBS의) 한 일일연속극입니다. 탤랜트 정선경씨는 여자 소방사로서 맹활약을 펼치지만 울산에서는 불가능한 설정입니다.'
기사의 첫 멘트를 일부러 이렇게 화두를 꺼내면서 정선경의 예쁜 얼굴을 편집해 테입을 SBS에 송고했다.
SBS에서 방송하겠다는 연락이 곧바로 왔다. 여성부 장관격인 강위원장의 인터뷰가 포함된 기사가 전국 방송을 탔다. 이튿날에는 관공서에 적용하는 고용평등법이 일반 회사보다 더 느슨한 문제점을 후속 기사로 보도했다.
여성 소방사 채용 절대 불가 방침이던 울산시는 이틀만에 방침을 바꿨다. 울산시 소방본부는 그 이듬해부터 남녀에게 동등한 응시 기회를 주겠다고 밝혔고 그 약속은 매년 지켜졌다. 그 결과 99년 당시 9명(전체의 2.4%)에 불과하던 울산시 여성 소방 공무원은 (지난 2003년 확인해보니) 불과 4년만에 34명 (전체의 5.9%)으로 늘었다.
그 후에 채용된 새내기 여성 소방사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심 흐뭇하다. 또 이들이 훌륭한 소방관이 되기를 늘 마음 속으로 바란다.
그 기사로 곤혹을 치른 소방 간부들은 요즘도 나에게 말한다.
'아군인 줄 알았는데 소방본부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군이었다'고.
하지만 이들과의 관계는 서먹해질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더욱 친해졌다.
소방관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기자들도 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닐까.(이영남 2003년 12월 한국기자협회 발간한 기자통신 게제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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