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

5만명이 도시 이주민..반세기 대책은 그대로

이영남기자 2015. 3. 20. 09:33

앵커멘트) 
 북한이 고향도 아닌데도 울산 지역내에 고향을 떠나 사는 실향민이 자그마치 5만명이 넘습니다.

 다름아닌 지난 반세기 산업화에 떠밀려난 원주민들로, 보상도 제대로 못받고 심지어 서너번씩 이주당하기도 했는데요.

 과연 현주소는 어떨까요?  탐사 취재반 이영남 기잡니다.

 

 

 

 

 리포트)
 황성동에 사는 이재구 씨.

 작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미역을 따는 어부들 중 한 명이지만 바다에 대한 애착은 남다릅니다.
 
 1996년 공장이 들어선 뒤 다운동으로 집단이주해갔지만 반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아내와 바닷가 컨테이너에서 산 지가 벌써 18년째.
 
 인터뷰)이재구(70)/남구 황성동 

 "막노동을 하러 찾아다녔는데 그것도 몇 달은 가능한데 겨울되니 일거리도 없고 그래서 바닷가로 다시 나오게 된 거예요."

 (CG1)반세기만에 급성장한 울산,1960년대 이후 산업단지로 4만명이 강제로 이주하고,
공업용수를 위한 5개 댐 건설로 2천7백명이, 원전 건설로 천3백명이 이주당했습니다.OUT)
 
 <<스탠덥: 울산에서 이같은 집단이주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집과 토지 등 금전적인 보상은 다소 이뤄지고 있지만 생계
대책은 여전히 전무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활기찼던 서생면 신리마을도 올 연말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앞두고 2백여 가구가 이주하게 되면서 뒤숭숭합니다.

 고리 원전으로 이주해온 골매마을은 이번이 두번쨉니다.

 

 인터뷰)안경남(50)/울주군 신리마을

"배를 하다 다른 동네에 가면 배를 못 대게 합니다.우리는 지금 어촌계에 들어있는데 어촌계도 다른 동네에 가면 바닷물도 못 쓰게 해서.."

 

 90년대 공해 때문에 남구에서 집단이주해온 태화동 오산마을도 다시 이주가 결정되면서 비상입니다.

 도로 건설로 혁신도시의 맨끝쪽 장현동으로 이주하게 된 89가구, 기존 상권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생계를 꾸리자니 걱정입니다.

 

 인터뷰)이석조(54세)/ 오산마을
 "22년을 장사하면서 생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주택지가 정해져있긴 한데 공업사인 상가는 갈곳이 없어."
 
 지난해 산업단지에 고향을 내준 오대오천마을 주민들은 어떨까.
 
 새로운 정착지인 율리 택지에는 집 짓기가 시작됐습니다.

 이주민 91가구 대다수가 택지는 구입했지만 곧바로 집을 지어 들어올 수 있는 가구는 30%, 나머지는 몇년 동안 전세로 떠돌지 기약도 못합니다.

 (CG2)새로운 택지의 공급가는 3.3제곱미터 당 170만원, 기존의 고향 집은 절반 정도만 보상받아 건축비가 모자란다는 설명입니다.
 인터뷰)송종열(70)/오대마을 출신 이주민 "3분의 2가 어려움 속에서 이렇게(전세로) 산다니까 택지는 받았지만 이주비는 적어"

 고향 마을은 이미 신일반산업단지로 바뀌었지만, 농민이던 상당수 주민들은 주변 논밭으로 출퇴근합니다.

 

 인터뷰) 오대마을 주민
 "그 나이에 나가서 농사 밖에 더 짓겠냐고,주변에 땅이 있으니아침에 일찍 와서 버스 내려서"

 

 (CG3)공익사업으로 10호 이상 이주 가구가 발생하면 실물 보상금과 이사비, 최대 1200만원의 이주정착금과 폐업시 영농보상금 등은 지원하지만 생계 대책은 빠져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OUT)

 

 인터뷰)한상진/울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원하는 직업에 대한 대책,직업훈련이 필요하면 직업교육을 해줘야되고 간접적 생계 대책이 더 추가돼야 되고" 

 오늘도 누군가 산업화 도시화에 떠밀려 삶의 터전을 떠나고 있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체계적인 기록물이나 연구는 고사하고, 실질적인 생계대책도 마련되지 않고 있습니다.

 탐사취재반 이영남입니다.(ubc프라임뉴스 2015년 3월 18일)